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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어린시절로 환원되는 풍경을 더듬다제천 원서 문학관을 다녀와서

가을이다. 산야의 나뭇잎마다 푸름 속에 감춘 속내를 내비치는지 눈 돌리는 곳마다 찬연한 빛이다. 그래서일까? 허리께로 자주 가는 중년의 나이인데도 가을 문학기행을 앞 둔 날부터 투명한 햇살 아래 홍조로 빛나는 단풍처럼 괜스레 마음이 설레었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애련로 855)에 있는 원서문학관. 시인이자 소설가인 오탁번 교수와 부인 김은자 교수가 폐교된 모교인 백운초등학교의 애련분교를 매입해 문학의 터를 잡은 곳이다.

영월에서 열리는 시낭송회에 가려고
제천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깊은 가을 뙤약볕이 눈부셔서
불붙는 단풍에 불을 델 것 같았다
중간 중간 버스가 설 때마다
내리는 사람이 한둘은 됐다
차창 밖 풍경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때 참 이상한 풍경을 보았다
학생이고 아주머니고 할머니고
내리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운전기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건성으로 하는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한창 나이 운전기사도 제집에 온 손님 배웅하듯 했다
-예, 고맙습니다
아아, 우리네 진짜 풍경은
차창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천 영월 간 38번국도
허름한 시외버스가 실어 나르는
호젓한 풍경에
나는 그냥 눈이 시렸다

원서문학관 마당에 있는 조각품.

이는 오탁번 시인의 ‘풍경’ 전문이다. 이 시의 구절처럼 가을 문학기행은 깊어가는 가을 뙤약볕이 눈부셔서 불붙는 단풍에 불을 델 것 같은 풍광을 차창으로 바라보는 기쁨도 있겠지만 오지마을 폐쇄된 자그마한 분교를 통해 어릴 적 추억을 더듬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단풍잎처럼 가슴이 달아올랐다.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애련로 855)에 있는 원서문학관은 ‘폭설’이라는 시를 통해 충북 오지 마을의 겨울 이미지를 해학과 생생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조명해 준 시인이자 소설가인 오탁번 교수와 부인 김은자 교수가 폐교된 모교인 백운초등학교의 애련분교를 매입해 문학의 터를 잡은 곳이다.

먼 서쪽을 의미하는 원서는 오탁번 시인의 고향 백운의 옛 이름으로 그 이름을 딴 원서 문학관은 2004년 3월 문예창작 교실을 시작으로 서울과 지방 문인들의 만남의 장을 열고 있다. 또 작가를 꿈꾸는 이들을 지도하는 한 편, 여러 문인들의 사진과 육필 원고를 수집, 보관, 전시하여 오는 이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곳이라 최근 시의 맥이 막힌 풋내기로 기대감이 컸다

11월 4일 토요일 오전 8시, 순천시 문화건강센터 앞에 집결한 주, 야간 반 시인학교 회원 22명은 21세기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분당의 율동지송회 회원들과 합류하는 박달재로 향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향하는 신기를 꿈꾸며 원서문학관으로 가는 길, 핏빛, 선홍빛 단풍과 주황빛 갈잎들이 몽글몽글 그려내는 가을 산 풍경에 모바일 폰을 창에 대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박달재노래비

1시 무렵, 천등산과 지등산이 이어지는 마루라는 박달재에 이르렀다. 먼저 도착한 분당의 율동지송회 회원들은 박달재 손두부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박달재 공원을 구경하는 중이라 시인학교 회원들도 식당에서 손두부 전골과 묵, 동동주로 간단한 점심을 한 뒤 주변 공원을 둘러보았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지는 박달재 고개는 그 애절한 전설을 전하듯 단풍나무마다 피빛 울음을 토하는 중이었다.

공원 사이사이 전설을 토하는 단풍나무 아래 금봉낭자로 박달도령으로 서서 카메라에 박달재 가을 풍광을 담은 뒤 다시금 2시간 여분을 달려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 위치한 원서문학관에 도착했다.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원서문학관 간판이 또렷한 원서문학관은 교실 세 칸으로 꾸며진 아담한 문학관이다.

문학관을 들어가기 전 몇 회원들의 시선을 붙들고 손짓하는 잎 다 부린 느티나무에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푸석해진 잎들이 융단처럼 깔린 가파른 언덕을 오르노라니 발자국마다 새 봄을 기약하며 스러지는 낙엽들의 지난 이야기들이 바스락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해마다 이 언덕을 오르며 창공을 향한 그네에 올라 문학의 의지를 굳혔을까를 떠 올리며 그네에 오르려는데 야간반 총무가 ‘헛 똑똑이의 시 읽기’ 책을 건네며 책 읽는 소녀의 포즈를 취하였다.

‘ㅎ, 예순을 눈앞에 둔 나이에 책 읽는 소녀?’

한 마디로 헛방귀 같은 웃음이 새어나올 일이지만 오늘 만이라도 초등 소녀의 마음을 품자는 심정으로 그네에 앉아 책을 펼쳤다. 독서하는 소녀상은 아니지만 가을을 품은 여인이길 기대하면서....... 뒤 이어 그네에 올라 발을 구르는 회원, 아이로 환원한 듯한 해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네를 타는 회원 등 고즈넉하던 느티나무 주변은 소란스러워졌지만 오랜만에 사람을 맞은 느티나무는 가지가지 새로 파란 하늘 웃음을 건냈다.

원서문학관 내부. 폐교를 개조했다.

느티나무에서 벗어나 훈민정음 표기로 쓰인 원서문학관 목각판이 반기는 곳으로 들어섰다. 분교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꾸며진 정원에는 소나무 그늘을 드리운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그 옆에는 둥그런 구를 움켜쥐려는 듯한 손 조각상, 탑, 석등, ‘설날’ 시비, 어머니 상 등이 자리하며 문학관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어머니의 손길로 다독여 주었다.

‘원서헌’이라는 현판이 안내하는 첫 교실로 들어서니 오탁번 시인의 사무실 겸 창작실이 꾸며져 있고 창을 등지고 앉아 있는 오탁번 시인이 시야에 들어 왔다. 인사를 드리고 앉아 사진을 한 컷 찍고 다음 회원들을 위해 일어나 교실 뒤로 가 보니 오탁번 시인이 정성스럽게 모은 다식판 ,촛대, 물레, 등잔, 도자기 등 골동품과 각종 패들이 진열되어 오지 마을의 생활을 잔잔하게 전해주었다.

복도 벽에는 우리나라 50여명의 대표 시인 사진과 육필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고 두 교실에는 100여 편의 육필 원고와 희귀 도서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어 전 근, 현대 문학의 일면모를 직감케 하였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오탁번 교수가 원서문학관을 설명하고 있다.

원서 문학관에선 매년 여름 방학이면 ‘어린이 시인학교’를 열고 문예 창작교실, 시낭송회, 시인과의 대화 등의 문학행사를 갖고 있으며 백운초등학교 학생 20-30 명을 대상으로 무료 문학 강의를 실시하여 새로이 돋음하는 문학인들의 싹에 힘을 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학관 이곳저곳을 두루 살피고 난 뒤 오탁번 시인의 문학강의를 들었다. 아직 어린이의 마음을 품은 듯한 또랑한 눈동자를 지닌 작은 거인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쉼 없이 전해지는 문학강의는 풋내기 시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두드렸다.

번득이는 우리말과 실생활에서의 시감이 돋보이는 ‘겨우살이’. ‘물만밥’ ‘꼴값’과 4차원의 상상력이 깃든 ‘헬리콥터’, 서정주 시인이 못 쓰고 간 시귀 인용의 ‘표절’ 등 직접 쓴 시를 통해 일깨워 준 시 강의는 뜬 구름 잡는 시에 매달린 새내기 시인들을 질책하고 질책하였다.

문학기행 기념사진 촬영

시 강의를 마치고 4시 무렵, 기행에 들어 있던 박하사탕 영화 촬영지 관람을 포기하고 다시금 21세기 관광버스에 올라 순천으로 가는 길, 회원들 가슴마다 눈 시린 가을 시마가 들어서는지 볼이 발긋하였다.

아마도 원서 문학관에 놓인 풍금 앞에서 두 회원이 들려주었던 학교종이와 비행기 노랫소리를 떠 올리며 먼 추억의 초등시절로 환원되고 있는 듯하였다. 어쩌면 다음 주 시인학교 수업시간엔 오탁번 시인의 ‘풍경’에서처럼 불에 델 것 같은 산야의 단풍이 아닌 허름한 시외버스가 실어 나르는 호젓한 풍경처럼 눈 시린 가을 풍경 담긴 시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정금 기자  yeoms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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